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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23. 08:54
제가 여진정벌 관련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4번글만 보고 해석을 해보자면,
임금은 장군들에게 여진 정벌 하라고 보내면서 본인은 온천 페이크를 탑니다.
당연히 아군인 정벌군은 물론이요. 적군은 여진군도 저 나라 임금은 온천이나 가면서 소수병력으로 탐문이나 한다고 정보를 입수했겠죠.
그래서 여진족 역시 정식적인 규모의 정벌군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흔적을 철저하게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정찰나온 정벌군의 태도도 진심으로 임금은 휴양가고 본인들만 정찰하러 왔다고 툴툴거리는 걸로 봐서 더욱 안심하고 있었겠죠. 대규모의 병력으로 치러온게 아니라고......
즉 요약하자면 아군과 적군을 모두 속여 적군을 안심하게 만들고 사실은 대규모의 병력을 끌고와서 정보 입수하는대로 정벌을 했다. 뭐 그런게 아닐까 합니다.
보통 장영실 위인전 보면 마지막 부분에 가마가 부서져서 대신들이 엄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지만, 세종이 끝까지 막아줘서 목숨은 부지하고 이후의 행적은 모른다로 나와있는데, 최근의 세종대왕 오덕설을 읽다보면 이 글의 3번쪽이 좀더 어울리는군요 -_-;;
1.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에는 대왕이 절대음감이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합병증으로 눈이 먼 이 후에 귀가 예민해진것 뿐이랍니다.
-> 세종대왕의 절대음감은 실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세종이 절대음감을 자랑한 사건은 제위 15년째 일이었는데 이땐 대왕의 눈이 극도로 나빠지기 훨신 이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세종이 장님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눈이 매우 나빠 거의 보이지 않아 장님처럼 느껴진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요.
2. 당시 조선은 달력과 시계가 없어 중국의 수시력이라는 책을 참고했었습니다.
헌데, 중국과 조선과의 공간적 차이 때문에 14분 정도의 오차가 생겼고,
'14분이면 내가 고기를 먹어도 2접시는 더 먹겠다!' 며 새로 만들어 오라고 했다고 하죠.
--> 그래서 조선형 달력을 새로 만들어 버렸죠... 이걸 주도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정인지였다는 사실은 뒤에 입만 살았던 소위 사림들과 많은 비교가 됩니다.
3.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궁궐로 돌아온 대왕은
장영실을 불러 곤장을 죽도록 패고는 궐 밖으로 내쫓아버리지요.
->실록에 따르면 대왕은 그동안의 공을 감안해 장영실의 벌을 2등 감형해주었다고 나옵니다. 그 후 장영실의 행적을 알 수 없는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조선 국왕으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당뇨병 같은 대사성질환을 앓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는 전혀 달라서 적게 움직이고 많은 먹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가능했던 왕이나 직계친족들은 아마 다들 당뇨병이나 고혈압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런 흔적이 보입니다.
비교적 근대에 왕위를 지냈던 고종 황제만 해도, 서양인 선교사들이 테니스 치는 것을 보면서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죠.
"저렇게 힘든 것은 아랫것들 시키지"
3번의 경우 세종대왕이 성향상 일부러 화를 내고 벌을 준다음 비밀리에 보호해준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당시에 왕의 옥체를 다치게 했다는건 사형에 가까운 중죄인데 이정도면 최소 죽을때까지 곤장을 맞거나 사약이라도 먹어야 될텐데 그런 기록조차없으니까요. 더구나 세종대왕시절 가마사건 전까지 자주 오르내리는 조선최고의 과학자중에 한명이 이런식으로까지 기록에 없는게 이상하죠. 뭐 장영실의 공적이 너무 큰나머지 양반들의 견제가 쎄서 가마사건을 일부러 일으켜 궁외에서 편안하게 살게해줄려고 이랬다라는 풍설도 있기도 합니다.
태종께서 친히 말씀하셨다죠.
'충녕이는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못하니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꼭 올려라'
아버지가 인증해줬으니 고기덕후가 맞다고 봅니다. ㅡㅡ
세종대왕은 레전드가 아닌 전설의 고기덕후 입니다.
설렁탕의 기원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으로 세종대왕이 선농단에 제사 지내고 돌아오면서 갑작스레 내린 비를 피하다가 배고프다고 선농단에 있던 소를 잡아 국을 끓이라고 시킨데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종이 충녕의 반찬에 반드시 고기를 올리라고 시킨 것은, 평상시가 아니라 자기(태종)이 죽고나면 유교 관례대로 자식들은 (매우 슬퍼한다는 의미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데, 충녕이 워낙 고기를 좋아하니 그러지 말라고 시킨 겁니다. 아무리 건국 초기라고 하지만 매우 파격적인 말이죠. 그만큼 세종의 고기사랑은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거의 흡사한데 제가 아는 장영실 가마사건은 '천문'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달력을 가져다 사용했는데, 시차 때문에 정확한 달력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시간과 달력, 천문에 큰 관심(세종때 만들어진 시계들만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죠)을 갖고 있던 세종은 조선만의 달력을 원했으나 천문은 천자인 명나라 황제만의 것이었기에 몰래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걸리면 바로 전쟁이죠~ 천자의 하늘을 탐했으니).
명을 받은 장영실은 명나라를 드나들며, 결국 천문관측기구(간의簡儀)를 만들어냈고 후에 이를 이용하여 정인지와 이순지가 결국 조선만의 달력을 완성해냈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명나라에서 조선의 이런 행보를 눈치챘고 기구를 만든 장영실을 내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세종이 장영실을 살리기 위해 가마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가설입니다.
사실 그 사건 이후로 장영실의 행적이 묘연해 결국 명나라도 장영실을 내어달라는 요구를 철회했고 그토록 총애하던 신하를 그런식으로 내친다는 것도 좀 어이없으니(사실 장영실 레벨쯤 되는 분이 만든 가마가 그렇게 부서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충분히 그런 가설이 돌법합니다(가마사건은 1442년, 명나라 사신의 방문을 대비해 천문대를 허문것은 1443년...) .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위의 가설을 바탕으로 장영실의 최후를 연출했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장영실 가마사건에 대해서 어렸을때 읽은 위인전의 내용을 더듬어보자면
1.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새 가마를 만듦
2. 세종이 새 가마 시승식겸 해서 나들이를 나섰는데 하필 그날 비바람이 몰아쳐서 가마가 부서지고 세종은 엉덩방아T
3. 왕의 옥체에 손상이 간 중대한 사건이라 국법에 따라선 처형도 가능하였으나 세종이 장영실을 보호하여 귀양으로 감형됨
4. 그후 장영실은 종적을 감춤
정말 조선시대 대천재 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년시절과 말년이 매우 불행했죠.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새로운 악기를 만들라고 지시를 했는데
악기를 만들어왔더니 "잘 만들었는데 여기서 반음정도 틀린 것 같다." 라고 했다더군요.
기존의 악기라면야 훈련으로 음감을 얻을 수 있을텐데 발명된 악기의 틀린 음을 짚는다는 것은 타고나지 않고서야 힘들 겁니다.
고로 저는 세종대왕이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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